기억을 소멸시키는 방식에 맞서: ‘아직’과 ‘이미’ 사이 그곳
진정한 이미지는 판화이다. 상상력은 우리 기억에 이미지를 새겨넣는다.
(가스통 바슐라르, 『공간의 시학』 중에서)
한 사람의 기억은 그 사람이 소유한 시간과 공간 안에서 빚어진다. 기억에 머무는 것은 경험된 시간과 공간이며, 기억이 머무는 곳 또한 경험된 시간과 공간이다. 이때 경험이란 한 사람에 의한 접근이 아니라 시공간과 사람의 어울림이라 할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해 볼 때, 삶의 터전만큼 기억이 집약된 곳도 없다. 이곳에서의 경험이란 시간이 보이거나 공간의 윤곽이 지금 내 시야에 들어오는 가시적인 모습이 아니다. 속도를 바로 느끼거나 조립하여 깊이감을 바로 만드는 것과 달리, 시간과 공간은 집에서 나와 함께 천천히 살아 숨 쉰다—이 호흡 덕분에 ‘결과적으로’ 기억은 빚어진다. 누군가 집을 허문다고 해서, 나와 시공간의 호흡은 사라진 후에도 남는다. 그곳이 기억이다.
윤일권의 개인전 《사라짐을 기억하는 방법》에서 사라짐을 기억하는 방법은 작가가 시선을 보낸 백사마을의 풍경을 사진으로 기록하는 일에서 출발한다. 작가의 개인사와 연관 깊은 이곳에서 길거리에 보인 물건들, 집의 외관, 마을을 조망한 모습을 기록하여, 이를 소재로 작업을 한다. 재개발이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 이미 집을 떠난 주민들도 있는 이곳의 풍경은 크거나 작은 이미지가 되어 전시장에 걸린다. 레이저 각인기로 판을 만들어 이미지를 CMYK 색상별로 포개놓아 하나의 이미지를 보여주는 방식, 스프레이로 물을 뿌리면 이미지가 녹아내리는 방식, 이미지가 큐브 형태로 벽돌처럼 쌓아놓은 방식은 ‘사라짐을 기억하는 방법’이라는 말과 정반대 방향의 태도처럼 보인다. 혹자는 분명 생각할 것이다. “기억을 해야 한다면 손으로 새기는—작가가 판화를 전공했다는 사실에만 비추어봐도—방법이 더 적합하지 않았을까?”
이번 개인전에서 중요한 점은 작가가 ‘사라지기를 거부하는 방법’을 택하지 않는 것이다. 인쇄 기술과 같이 기계적으로 찍히는 <The Path of Eyes- 오래된 집> 등, 물에 젖어서 떨어진 부스러기를 레진 안에 담은 <Two Layers-백사마을>은 쉽게 기록되기도 하면서도 쉽게 소멸하기도 한다. 기억하기에 결부되는 ‘새기는’ 방법은 윤일권의 작업에서 물성과 기술에 얽매이지 않은 태도로 풀이된다. 그 결과, 전시는 어쩌면 사라지기를 받아들이는 태도로부터 출발했을지도 모른다. 《사라짐을 기억하는 방법》에서 윤일권은 사라짐을 ‘기록하는’ 대신 사라지기를 ‘기억하는’ 방법을 작품으로 제시한다. 반투명하고 흐릿한 이미지로 남은 수많은 큐브(<White Plate Collection: 벽>), 새기는 일보다 기계적 기록에 가까운 평면 작업, 없어진 집의 흔적을 찌꺼기로 보관한 결과물에서 이미지는 지역의 역사에 귀를 열심히 기울이거나 재개발과 철거에 반대하는 강력한 목소리를 내는 방법과 다르다. 오히려 작품은 기억을 소멸시키는 방법에 맞서, 기억이야말로 남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작가는 보이는 것을 사진으로 기록하여 이를 토대로 작업으로 풀어냈지만, 그의 시선은 눈앞에 있는 것보다 더 멀리 가 있다. 이번 전시에서 외관에 주목한 이유가 있다면, 바로 그 너머, <Two Layers-백사마을>처럼 형태가 없어지고 구멍처럼 뚫린 곳에 기억이 존재함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혹자는 삶의 터전이 사라질 때 이곳에 결부된 기억 또한 사라진다고 할지도 모른다. 집의 부재는 삶의 부재이며 기억의 소멸이라는 등식이 성립하기 전에, 그는 실내만큼 개인의 생활감이 두드러지지 않는 집의 외관에 시선을 보낸다. 작품에 기록된 집은 아직 사람이 살거나 이미 떠난 곳이다—‘아직’과 ‘이미’ 사이에서 기억은 존재한다. 곧 철거를 앞둔 건물 앞에서 작가는 외관의 견고함이나 (반대로) 빈약함도 아닌, 그 내부에 무언가가 담겨 있다는 시선으로 본다. 하드웨어(hardware)인 집이 사라지면 그곳에서 시간을 보낸 기억 또한 사라지는 등식에 맞서, 작가는 그 시공간을 소유한 이들의 통약할 수 없는 역사에 주목하여 이를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담는다.
통약할 수 없는 역사는 작품을 통해서 개개인으로 되돌아온다. 집—오래 머물거나 잠시 머물거나—에서 지낸 시간은, 아직 있거나 이미 떠난 익명의 소유자에게서 작가에게, 그의 시선에 비친 것들이 작업을 통해서 보는 사람의 기억으로 거슬러 간다/온다. 각자의 회상에 사라짐과 기억이 동시에 제 모습을 드러낸다. 지금은 살지 않은 곳에, 유년기에 살던 기억이 머릿속에 떠오를 때, 보는 사람의 기억 또한 사라짐에( 맞)서 구원된다. 집 너머 보이지 않지만 있는 것들, 설령 집이 자연스럽게 허물어지거나 일방적으로 철거된다고 하더라도 남는 것이 거기에 있다. 기억이란 이곳이 아닌, 거기에 머무는 것이 아닐까. 서두에 인용한 구절에서 가스통 바슐라르가 판화에 빗대어 말한 집은 은둔자의 집이다. 집의 외관은 모든 사람을 은둔자, 즉 집과 함께 시간과 공간을 공유하며, 경험에 깊이를 키워나가는 사람으로 받아들이고 존중한다. 이를 보는 사람은 기억을 소멸시키는 방식에 맞서 빚어진 기억을 그곳—백사마을과 내게 있도록 해 준다.
(콘노 유키 독립 큐레이터)
진정한 이미지는 판화이다. 상상력은 우리 기억에 이미지를 새겨넣는다.
(가스통 바슐라르, 『공간의 시학』 중에서)
한 사람의 기억은 그 사람이 소유한 시간과 공간 안에서 빚어진다. 기억에 머무는 것은 경험된 시간과 공간이며, 기억이 머무는 곳 또한 경험된 시간과 공간이다. 이때 경험이란 한 사람에 의한 접근이 아니라 시공간과 사람의 어울림이라 할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해 볼 때, 삶의 터전만큼 기억이 집약된 곳도 없다. 이곳에서의 경험이란 시간이 보이거나 공간의 윤곽이 지금 내 시야에 들어오는 가시적인 모습이 아니다. 속도를 바로 느끼거나 조립하여 깊이감을 바로 만드는 것과 달리, 시간과 공간은 집에서 나와 함께 천천히 살아 숨 쉰다—이 호흡 덕분에 ‘결과적으로’ 기억은 빚어진다. 누군가 집을 허문다고 해서, 나와 시공간의 호흡은 사라진 후에도 남는다. 그곳이 기억이다.
윤일권의 개인전 《사라짐을 기억하는 방법》에서 사라짐을 기억하는 방법은 작가가 시선을 보낸 백사마을의 풍경을 사진으로 기록하는 일에서 출발한다. 작가의 개인사와 연관 깊은 이곳에서 길거리에 보인 물건들, 집의 외관, 마을을 조망한 모습을 기록하여, 이를 소재로 작업을 한다. 재개발이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 이미 집을 떠난 주민들도 있는 이곳의 풍경은 크거나 작은 이미지가 되어 전시장에 걸린다. 레이저 각인기로 판을 만들어 이미지를 CMYK 색상별로 포개놓아 하나의 이미지를 보여주는 방식, 스프레이로 물을 뿌리면 이미지가 녹아내리는 방식, 이미지가 큐브 형태로 벽돌처럼 쌓아놓은 방식은 ‘사라짐을 기억하는 방법’이라는 말과 정반대 방향의 태도처럼 보인다. 혹자는 분명 생각할 것이다. “기억을 해야 한다면 손으로 새기는—작가가 판화를 전공했다는 사실에만 비추어봐도—방법이 더 적합하지 않았을까?”
이번 개인전에서 중요한 점은 작가가 ‘사라지기를 거부하는 방법’을 택하지 않는 것이다. 인쇄 기술과 같이 기계적으로 찍히는 <The Path of Eyes- 오래된 집> 등, 물에 젖어서 떨어진 부스러기를 레진 안에 담은 <Two Layers-백사마을>은 쉽게 기록되기도 하면서도 쉽게 소멸하기도 한다. 기억하기에 결부되는 ‘새기는’ 방법은 윤일권의 작업에서 물성과 기술에 얽매이지 않은 태도로 풀이된다. 그 결과, 전시는 어쩌면 사라지기를 받아들이는 태도로부터 출발했을지도 모른다. 《사라짐을 기억하는 방법》에서 윤일권은 사라짐을 ‘기록하는’ 대신 사라지기를 ‘기억하는’ 방법을 작품으로 제시한다. 반투명하고 흐릿한 이미지로 남은 수많은 큐브(<White Plate Collection: 벽>), 새기는 일보다 기계적 기록에 가까운 평면 작업, 없어진 집의 흔적을 찌꺼기로 보관한 결과물에서 이미지는 지역의 역사에 귀를 열심히 기울이거나 재개발과 철거에 반대하는 강력한 목소리를 내는 방법과 다르다. 오히려 작품은 기억을 소멸시키는 방법에 맞서, 기억이야말로 남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작가는 보이는 것을 사진으로 기록하여 이를 토대로 작업으로 풀어냈지만, 그의 시선은 눈앞에 있는 것보다 더 멀리 가 있다. 이번 전시에서 외관에 주목한 이유가 있다면, 바로 그 너머, <Two Layers-백사마을>처럼 형태가 없어지고 구멍처럼 뚫린 곳에 기억이 존재함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혹자는 삶의 터전이 사라질 때 이곳에 결부된 기억 또한 사라진다고 할지도 모른다. 집의 부재는 삶의 부재이며 기억의 소멸이라는 등식이 성립하기 전에, 그는 실내만큼 개인의 생활감이 두드러지지 않는 집의 외관에 시선을 보낸다. 작품에 기록된 집은 아직 사람이 살거나 이미 떠난 곳이다—‘아직’과 ‘이미’ 사이에서 기억은 존재한다. 곧 철거를 앞둔 건물 앞에서 작가는 외관의 견고함이나 (반대로) 빈약함도 아닌, 그 내부에 무언가가 담겨 있다는 시선으로 본다. 하드웨어(hardware)인 집이 사라지면 그곳에서 시간을 보낸 기억 또한 사라지는 등식에 맞서, 작가는 그 시공간을 소유한 이들의 통약할 수 없는 역사에 주목하여 이를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담는다.
통약할 수 없는 역사는 작품을 통해서 개개인으로 되돌아온다. 집—오래 머물거나 잠시 머물거나—에서 지낸 시간은, 아직 있거나 이미 떠난 익명의 소유자에게서 작가에게, 그의 시선에 비친 것들이 작업을 통해서 보는 사람의 기억으로 거슬러 간다/온다. 각자의 회상에 사라짐과 기억이 동시에 제 모습을 드러낸다. 지금은 살지 않은 곳에, 유년기에 살던 기억이 머릿속에 떠오를 때, 보는 사람의 기억 또한 사라짐에( 맞)서 구원된다. 집 너머 보이지 않지만 있는 것들, 설령 집이 자연스럽게 허물어지거나 일방적으로 철거된다고 하더라도 남는 것이 거기에 있다. 기억이란 이곳이 아닌, 거기에 머무는 것이 아닐까. 서두에 인용한 구절에서 가스통 바슐라르가 판화에 빗대어 말한 집은 은둔자의 집이다. 집의 외관은 모든 사람을 은둔자, 즉 집과 함께 시간과 공간을 공유하며, 경험에 깊이를 키워나가는 사람으로 받아들이고 존중한다. 이를 보는 사람은 기억을 소멸시키는 방식에 맞서 빚어진 기억을 그곳—백사마을과 내게 있도록 해 준다.
(콘노 유키 독립 큐레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