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Grasp at the Air
별관, 2024 년 11 월 8 일부터 12 월 1 일까지
신발 때문이야 ,
내 신발이 때로는 네 신발이 없었던 곳에 있었기 때문이야.
추억은 애정이다. 예술에 대한 애정, 자연에 대한 애정, 그리고 연인에 대한 애정 등 모든 애정은 우리가
그 대상과 맺는 관계이지만, 모든 관계가 애정인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모든 추억은 기억이지만 모든
기억을 우리가 추억하는 것 또한 아니다. 좋은 기억들 가운데 아주 특별한 것들만 추억의 영역까지 올라설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기억들은 그 특별함의 힘 덕분에 우리가 어떤 별도의 노력을 들이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추억이 된다. 즉 능동적인 수고 없이도 추억이 되는 것이다. 애정이란 누군가를, 또는 무언가를
억지로 사랑하는 게 아니라 자연스럽게 꽃피는 감정인 것과 마찬가지로, 추억도 그렇게 자연스럽게
만발한다. 수동성은 종종 능동성의 반의어로 언급되며 따라서 능동적이지 못하다는 부정적인 함의를
지니기 마련인데, 애정과 추억의 담론은 그 반례를 제공한다. 애정과 추억은 아름답고 고마운 수동성을 갖고 있는 것이다.
윤일권의 으버(œuvre)는 추억을, 그리고 추억의 이러한 성격을 영감으로 삼는다. 아울러 추억의 대상이
지닌 소멸 가능성, 그에 따른 아쉬움의 가능성, 그리고 그 아쉬움을 극복할 수 있는 예술적 가능성에 대한
통찰이 작업의 무형적 재료가 된다. 10 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 말이 있듯이, 인류보다 거대한 자연이 만든
것들조차 지속적으로 변하거늘, 우리가 만드는 모든 것 또한 변화의 가능성을, 즉 소멸과 재생의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우리가 과거에 다닌 학교는 지금 새로운 학생들과 교사들이 만나는 곳이고, 리모델링 되거나
아예 철거되어 새로운 건물이 되기도 한다. 학교 앞에서 친구들과 색연필과 스케치북을 구입한 문구점도,
귀한 용돈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 고민하며 간식을 고르던 슈퍼마켓도 마찬가지이다. 그때의 경험들은
그때만의 경험들이기에 불변의 추억이 되나, 그 유형적 일부인 장소라고 하는 것은 언제나 가변성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변형이 일어나면, 그 변형을 직접 목격하거나 그에 대한 소식을 접할 때 우리는 변형의
가능성을 확인하게 되고, 그에 대한 반응으로 느끼는 아련함을 통해 변형의 가능성이 아쉬움의 가능성을
수반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또한 우리는 아쉬움의 정서를 자연스럽게 극복하고자 하는 성격을
보편적으로 지니고 있기에, 극복에 대한 다양한 생각과 행동을 취하게 된다.
‘철거하지 않았으면 좋았을텐데’와 같은 생각을 하게 되고, 추억을 함께한 친구에게 오랜만에 연락하기도 하며,
먼지가 다소 쌓인 사진 앨범의 잠을 오랜만에 깨워 보기도 한다. 이처럼 변형의 가능성은 아쉬움의 가능성과 동행하고,
아쉬움의 가능성은 그 극복 가능성과 동행하며, 결과적으로 여러 일반적인 극복 방법들이 실천되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일반적인 방법을 넘어 예술적인 실천으로는 무엇이 가능할까. 작업의 기술적 방식으로 판화를
익히고 실험해온 윤일권은 추억의 유형적 성분들을 사진으로 1 차 재현한 다음, 전통적인 판화 기법을 넘어
새로운 동시에 자기가 사유하는 주제들과 이상적으로 어울릴 수 있는 자신만의 기법으로 2 차 재현의
작업을 거쳐 작품을 완성한다. 가령 학교와 학교 앞 가게 등의 건축물, 운동회와 간식 구매 등 그 장소들에서
장소-특정적으로 일어난 사건들, 그리고 당시에 실시간으로 그 사건들을 시각적으로 기록한 사진들인 졸업
앨범 사진들을 1 차 재현의 재료로 마련된 다음, 이들이 일반적인 판화 기법으로는 재현이 불가능한
윤일권의 독창적인 2 차 재현 기법을 만나 관객에게 추억이라는 주제에 대한, 새로운 판화 기법이라는 창작
기술에 대한, 그리고 그 둘의 결합이 갖는 의미에 대한 작품이 탄생하는 것이다.
이 새로운 판화 기법이라고 하는 것은 냅킨, 실리콘, 타일 등 매체의 새로움 뿐만 아니라 조각과 설치
작품 등 기하학적 새로움 또한 지닌다. 그리고 작업의 이 새로운 기술적 차원은 추억에 대한 새로운 이해와
실천 방식이라는 작업의 정신적 차원을 통해 생성 및 진화한다. 윤일권이 통찰하는 추억이란, 한마디로
‘능동적이고 창의적인 추억하기’ 정도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즉 소멸-아쉬움-극복의 방정식을 지배하는
수동성을 해체하여 이에 예술적 능동성을 불어넣는 것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 우리의 추억을
구성하는 대상들이 모두 불가피하게 소멸 가능성을 본질적으로 지니고 있다면, 그 보존을 위한 노력이나
보존에 실패하여 아쉬움의 감정을 느낄 때 쏟는 정서적 극복의 노력 말고도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을
윤일권은 제시하는 것이다. 그건 다름 아닌 우리의 추억이라고 하는 것만큼은 우리가 평생 보존할 수
있음을 이해하고 희망하는 것, 그리고 예술적 상상력을 통해 그 추억을 가지고서 새로운 유의미한 경험들을
지속적으로 생성시키는 것이다. 추억과 판화에 대한 전통적인 이해를 해체하고 다양한 입체적인 형태로
재결합하여 그 추억을 보존하고 새로운 추억-예술-감상의 방정식들을 윤일권은 만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 가장 최근의 방정식이 별관에서 개최하는 개인전 《A Grasp at the Air》이다. 그리고 이는 두 개의
방정식으로 구성된 일종의 연립방정식이라고 볼 수 있다. 하나는 갤러리의 절반을 책과 형태가 유사한
전통적 사진 앨범이 아닌 ‘공간’의 형태를 띈, 그래서 펼쳐서 보는 게 아니라 몸 전체가 직접 들어가고 걸어
다니면서 그 안을 볼 수 있는, 그런 ‘신체 입장형 앨범’이고, 그 안의 작품들도 전통적인 사진이나 판화라고
볼 수 없는, 초-사진적이고 초-판화적인 입체적 작품들이다. 반면 갤러리의 남은 절반은 아예 ‘건축 판화,
’또는 좀 더 엄밀히 말해 ‘판건축’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실리콘과 타일 등의 건축 재료로 만들어진
작품들이 갤러리라는 건축물에 설치된 것을 넘어 아예 공간 그 자체가 되어버린 형태를 지니고 있으며,
이는 건축이라는 유형적 존재가 설사 소멸할 수 있더라도, 그에 대한 추억이라는 무형적 존재는 보존은
물론 심지어 시각 예술로 유형적 재건 또한 가능하다는 감상의 가능성을 지닌다. 윤일권이 직접 지은 이
전시의 제목이 시사하는 것처럼, 붙잡을 수 없는 공기가 붙잡을 수 있는 게 되고, 전시는 그 새로운 공기로
둘러 쌓인 건축, 추억과 예술의 공간, 그리고 추억과 예술의 우리이다.
우리는 각자 고유의 추억들을 지니고 있는데, 이들이 서로 다른 여러 이유 가운데 하나는 우리의 경험이
각자 다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교과 수업이라는 경험은 학교에서 일어나고 꿈이라는 경험은 침실에서,
또는 수업 중에 졸거나 미술 시간에 교과서에 실린 어느 작품 이미지를 보고 감명받아서 학교에서도 일어날
수 있다. 즉 경험은 반드시 어느 장소에서 일어난다, 반드시 자기 신발이 닿은 곳에서 일어난다. 윤일권의
추억도 마찬가지이다: 그의 추억들이 만들어진 모든 곳에는 그의 신발이 있었고, 따라서 신발이 닿은
곳들은 그에게 특별하다. 이 기획문의 첫 두 줄은 예술가의 그 발자취에 대한 존중과 헌사이다. 또한 그는
그곳들을 갖고서 우리의 신발이 닿을 갤러리에 예술적 발자취를 남긴다. 작가와 관객의 발자취가 만나
우리의 새로운 발자취가 되고, 새로운 추억, 그리고 새로운 예술이 되리라.
안재우(독립 큐레이터, 문화평론가)